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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배의 즐거움

박시영

영화 포스터 디자이너 박시영은 전라남도 고흥에 산다. 평화로운 남해안을 품은 섬 외곽에 집을 짓고서. 20년간 업계 최고 디자이너로 명성을 떨친 그는 왜 서울에서 400km가 넘게 떨어진 지역으로 이주했을까? 별다른 연고도 없던 소도시에서의 삶은 작업 반경과 스타일을 넓히고, 지역을 바라보는 디자이너의 시선을 바꿨다.

𝗜𝗻𝘁𝗲𝗿𝘃𝗶𝗲𝘄𝗲𝗲 Siyoung Park

𝗘𝗱𝗶𝘁 Jeonghyeon Kim

𝗣𝗵𝗼𝘁𝗼𝗴𝗿𝗮𝗽𝗵 Chanwoong Jeong


박시영

그래픽 디자인 스튜디오 ‘빛나는’ 대표. 영화 포스터를 비롯해 국내외 다양한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키 아트*를 제작한다. 2006년 《짝패》를 시작으로 《관상》, 《베테랑》, 《왕과 사는 남자》, 《호프》 등의 상업영화부터 《우리들》, 《벌새》, 《세계의 주인》 같은 독립영화까지 500개가 넘는 영화 포스터를 통해 시대의 풍경을 기록해 왔다. 경북 구미에서 나고 자라 열여덟 살이 되던 해 혼자 서울로 상경했고, 2021년에는 전남 고흥으로 이주했다. 바다가 보이는 섬모퉁이 집에서 애인과 검은 개와 함께 살아가는 중이다.


*키 아트(Key Art): 영화, 드라마, 전시, 광고 등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정체성과 메시지를 담은 대표 마케팅 비주얼. 메인 포스터를 비롯해 모든 홍보 디자인의 기반이 되는 이미지를 뜻한다.

디자이너 박시영이 제작한 포스터. 상업영화와 독립영화, 전시와 공연, 광고와 축제까지 분야와 스타일을 가리지 않고 국내외 엔터테인먼트 콘텐츠의 키 아트를 제작해 왔다. (제공: 스튜디오 빛나는)



Q. 2021년, 서울을 떠나 고흥으로 내려갔습니다. 터전을 옮긴 이유가 궁금한데요.

서울에서 살고 싶은 집을 찾는 게 힘들었어요. 비싼 가격에 비해서 자재도, 전체적인 만듦새도 다 싸구려 같은 거예요. 내가 찾는 건 자산 가치로서의 부동산이 아니라 오래오래 살 주택이었으니까. 빈 땅도 없고 그렇다고 건물을 허물어서 새로 짓고 싶진 않고. 그래서 눈을 밖으로 돌린 거죠. ‘여기서는 원하는 집에 사는 게 불가능하겠다.’


Q. 그럼 왜 다른 지역이 아닌 고흥이었을까요?

바닷가에 살고 싶어서 부산 기장부터 배를 타고 가면서 남해안을 쭉 훑어봤어요.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남해안 벨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특히 통영부터 진도까지 이어지는 라인은 하롱베이나 시칠리아가 안 부럽다니까. 어느 날은 고흥 익금해수욕장에 내려서 시간을 보내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양지바른 땅에서 따뜻하게 환대받는 느낌을 받았어요. 아, 여기다. 그냥 여기에 집 지어버리자. 


Q. 벌써 5년 차 고흥 군민으로 살고 있습니다. 살아 보니 고흥의 어떤 점이 재밌고 흥미롭던가요?

사람들이 발랄하고 호방해요. 기꺼이 베풀 줄 아는 환대 문화가 있더라고. 옛날부터 풍요로운 곡창지대에, 따뜻한 바닷가에, 얼마나 먹고 놀고 나누기 좋았겠어요. 남도가 가진 일종의 너른 품에서 오는 바이브가 참 매력적이에요. 사람 손 많이 안 탄 자연 풍경이야 말할 것도 없고.




"바다 위에서 바라보는 남해안 벨트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아요? 
특히 통영부터 진도까지 이어지는
라인은 하롱베이나 시칠리아가 안 부럽다니까."



Q. 서울에서 고흥까지 오는 데 5시간 넘게 걸리더라고요. 너무 멀리 떠난다는 두려움은 없었나요?

사람 간의 물리적 거리감이 빠르게 줄어들고 있잖아요. 통신망 속도에 자율주행에 로보틱스에, 10년 안에는 더 획기적으로 발전할 거라 봤어요. 그렇게 되면 사실 기회는 지방에 있거든요. 내가 아쉽게 생각하는 점이 그거예요. 자원이 넘쳐나는데 그걸 볼 수 있고 받아먹을 수 있는 애들이 지금 지방에 없다는 거.


Q. 언젠가 SNS에 “고흥에 내려오니 서울 살 때보다 일하는 반경이 더 넓어졌다”라고 썼죠. 영화 포스터를 포함한 엔터테인먼트 디자인 일은 서울에 몰려 있을 텐데, 일하는 데 무리가 되진 않나요?

여기저기 오가면 피곤하긴 하죠. 근데 깡시골 살다가 서울 가면 약간 여행 가는 기분도 들던데(웃음). 고흥에서 서울 가는 거나 도쿄 가는 거나 걸리는 시간은 비슷해요. 자주 왔다 갔다 하니까 전혀 보이지 않던 마켓이 보이기 시작하는 거 있죠. 실제로 일본 클라이언트가 늘었어요. 요즘에는 미국이나 파라과이에서도 연락이 오데. 서울 바깥의 시장이 얼마나 큰데요. 


Q. 원격으로 업무를 수행하는 만큼 작업 루틴도 중요할 것 같습니다. 농사짓고, 개 산책 시키고, 바다 보러 나가는 생활하고도 분리가 잘 돼야 할 텐데요. 평소엔 어떻게 관리하나요?

20년 동안 별의별 방법을 다 써봤거든요. 여기 와서 내린 결론은 ‘유연성에 기대자’는 거예요. 파트너 따라 업무 성격 따라 예산 따라. 루틴이라는 것도 결국 일 자체의 루틴이 아니라 나라는 사람의 루틴인 거잖아요. 자의적인 기준이라서 수많은 변수 앞에서 다 지킬 수가 없어요. 오히려 나에게 오는 바람처럼 그때그때 처리하다 보니까 생산성이 엄청 올랐어요. 스스로 정한 제약이 없다 보니 디자인적으로 실험도 많이 하게 됐거든요. 사람들이 그러더라고. “박시영 한물간 줄 알았는데 요즘 또 스타일 좋아졌네”(웃음).



서울에 없는 것, 서울이 못 따라하는 것 



Q. 디자이너의 시선으로 바라본 로컬 콘텐츠도 궁금합니다. 국내 관광 상품이나 각종 지역 이벤트를 향한 부정적인 시선도 적지 않은데요.

안 그래도 할 일 많은 공무원들한테 아이디어 내고 기획까지 하라고 쥐어짜니까 다 똑같아지는 거예요. 지역에서 활동하는 문화 기획자들이 있잖아요. 밖으로 눈 돌리면 더 많을 거고. 그들 각자가 치열하게 기획하고 상품화한 걸 투명하게 사고팔 수 있는 마켓을 열어 주면 돼요. 스스로 가격도 정하게 하고, 지자체는 클라이언트가 돼서 이것저것 비교해 보면서 그 기획을 구매하는 거죠. 


Q. ‘내가 하면 더 잘할 수 있는데’라고 생각했던 기획자와 디자이너에게는 뛰어들 만한 무대가 되겠네요.

지금 일감 없어서 미칠 것 같은 건축학과나 광고홍보학과 졸업생들이 얼마나 많은데! 아이디어 많고 의욕 넘치는 친구들한테 잘할 수 있는 걸 하게 해줘야죠.



Q. 수도권에 비해 지방은 동시대 문화적 인프라가 부족하다는 점에서 더 한계를 느끼는 것 같아요.

서울만큼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켜 주지 못하면, 서울에서 채울 수 없는 아예 다른 욕구를 개발하면 돼요. 지역의 삶을 넘어서 ‘대안적 삶’의 모델을 제시해야죠. 따라 살아 보고 싶은 매력적인 라이프스타일을 보여주든지, 경제적 이익을 얻어갈 수 있는 장치를 마련하든지. 지금은 청년들 입장에서 어느 쪽으로도 길이 안 보이니까 굳이 지방에 정착할 이유가 없는 거예요.


Q. 사실 제대로 활용되지 않아서 그렇지, 지역이 품은 독특한 자원은 이미 많을 텐데요.

아까 고흥 처음 와봤는데 너무 좋다고 그랬잖아요. 바닷물 맑지, 섬은 왜 이렇게 많고, 묘하게 제주 느낌도 나는데, 또 처음 보는 것 같은 이국적인 풍경이라고. 여행이라는 게 원래 그 낯섦을 만나기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럼 지방은 뭘 해? 잔뜩 낯설어지면 돼요. 서울에 없는 거, 서울이 못 따라 하는 거 보여주면서.


Q. 지역 기반의 창작자와 생산자로서는 어떤 부분을 더 고민해 보면 좋을까요? 

일단 서울에 대한 콤플렉스와 패배주의부터 인정해야 해요. 끊임없이 서울을 인식하면서 창작하고 있다는 거, 지방 환경을 자기변명이나 핑곗거리로 쓴다는 걸 부정하지 마세요. 사모아섬에 사는 소녀가 그린 회화가 홍콩 아트마켓에서 몇십억에 팔리는 시대잖아요. 지역에 있는 아티스트라는 말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도 돼요. 그냥 아티스트. 진짜 중요한 건 ‘어떻게 더 많이 보여줄까’ 고민하는 거예요. 발견하는 수고를 들이는 대중은 이제 없어요. 알고리즘이 다 떠먹여 주는데 뭘. 어떻게 하면 내 기획과 결과물이, 내 예술이 더 잘 노출될 수 있을지 신경 써야 해요. 할 수 있는 건 다 해봐요. 



"지역에 있는 아티스트라는 말 자체를 머릿속에서 지워도 돼요.
그냥 아티스트. 
진짜 중요한 건 ‘어떻게 더 많이 보여줄까’ 고민하는 거예요."


동료와 함께 움직이기

결핍 대신 자원에서 출발하기



Q. 여러 인터뷰를 통해 어린 친구들에게 강조한 말 중 하나가 ‘고립되지 마라’입니다. 문화적 인프라가 빈약한 소도시일수록 더 중요한 문제일 것 같아요.

그래서 동료를 찾아야 돼요. ‘지역에 갇혀 있다’는 자기변명을 깨주는 게 동료들이니까.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함께 뭔가를 만들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고일 수가 없어요. 똑같은 걸 몇 년째 시도해도 동료는 그걸 밀고 갈 힘을 줘요. 또 다른 방식으로 바꿔볼 수 있는 힘도 주고.


Q. 어떻게 하면 좋은 동료를 찾을 수 있을까요? 내가 좋은 동료가 되기 위해서는요?

아이디어랑 목적의식만 생각해요. 이런저런 부분에서 나랑 맞냐 안 맞냐를 따지지 말고. 나한테 딱 맞는 바지 치수도 없는데 심지어 정치 성향까지 비슷한 사람을 찾는다? 그럼 만날 수 있는 사람 아무도 없어요. 내 아이디어를 실현하고 이 프로젝트를 잘 수행할 사람을 찾는다는 건 말하자면 이기적인 행동이잖아요. 그 이기적인 행동으로 엮이는 게 동료란 존재입니다.



"동료를 찾아야 돼요. 
‘지역에 갇혀 있다’는 자기변명을 깨주는 게 동료들이니까. 
공동의 목적을 가지고 함께 뭔가를 만들고 행동하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고일 수가 없어요."


Q. 3년 전 호남 기반의 디자인 전공생과 창작자, 기획자 등을 대상으로 워크숍 ‘빛남’을 진행한 적이 있습니다. 지난달에도 새로운 워크숍 모집 공고가 올라왔고요. 이 또한 후배들에게 동료를 찾아주고자 시작한 프로젝트일까요?

처음엔 업무 시스템이나 실무를 학습할 기회를 주고 싶어서 시작했어요. 우리가 일하는 걸 보여주는 일종의 참관수업처럼. 근데 워낙 의욕들이 넘치다 보니 강의도 조금씩 해주고 하면서 판이 커진 거죠. 지금 이 친구들한테 가장 필요한 건 낯설고 새로운 무언가를 해볼 기회예요. 같은 목적을 가진 동료를 만나서 대화도 나누고 으쌰으쌰 해보는 경험. 그것만 있어도 스스로 잘할 수 있어요.


Q. 8월에 시작할 워크숍은 어떤 부분을 중심으로 진행될까요?

지난번에는 아이디어의 씨앗을 심어줬다면, 이번에는 지역에서 실제 사례를 내보는 게 목표예요. 부모님이 하던 카페를 리뉴얼 해보고 싶은 친구, 제로웨이스트숍을 운영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친구 등등 다양한 지원자를 잘 엮으면 시너지가 날 거예요. 지역 자원을 활용해서 청년들이 돈을 벌 수 있는 현실적인 사례를 만들어 봐야죠. 온오프라인으로 세미나와 강의를 제공하고, 현업 전문가의 코칭도 받을 수 있게 애써볼 거예요.



"지방은 뭘 해? 잔뜩 낯설어지면 돼요. 
서울에 없는 거, 서울이 못 따라 하는 거 보여주면서."


Q. 지자체 차원에서는 청년들에게 어떤 걸 제공하는 게 효과적일까요?

청년몰 같은 것만 조성하지 말고, 그 돈으로 차라리 서울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게 KTX 기차표를 지원했음 좋겠어요. 서울에 있는 걸 답습할 게 아니라 아예 원 없이 보고 듣고 경험하게 해주는 거지. 지역에서는 지역에만 있는 자원을 활용하면 되니까요. 그렇게 되면 이 친구들한테는 서울의 콘텐츠가 결핍이 아니라 보너스가 되는 거예요. 두 배의 즐거움을 누리게 해줘야죠.


Q. 반대로 서울과 수도권에서, 또 주류 제도권 안에서만 경험하고 일해온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 환경 때문에 답답함을 느끼는 경우도 적지 않아요.

내가 가진 것에서 출발하면 돼요. 그 풍족한 조건, 제대로 교육받고 관계 맺은 환경에서 얻게 된 엄밀한 미적 감각 같은 게 있거든. 나한테 있는 걸 잘 더듬어 보면서 정말 첨예한 무언가를 만들어 봐요. 출발하려면 일단 일어나야 해요. 지금 할 수 있는 그것부터 해보면, 바로 또 움직이게 돼 있어요.



제한 없이 세상을 넓게 쓴다면



Q. AI와 로봇, 자율주행을 비롯한 고도의 기술 발전은 기존의 대도시-지방 구조와 경계에 적잖은 영향을 미칠 겁니다. 앞으로 지역에서 살아가는 디자이너와 생산자에게 어떤 덕목과 역량이 요구될까요?

내가 익숙하게 해온 방식, 말하자면 과거와의 단절이 필요할 거예요. 테크놀로지를 어떻게 이용할까에 대해서도 깊게 관심을 둬야 할 거고. 근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제한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때그때 재밌는 거 하고 그때그때 필요한 걸 하세요. 서울 가고 싶으면 가고, 시골에 있고 싶음 있어요. 인생이 이렇게 길고 재밌는 게 얼마나 많은데 왜 하나만 가지려고 해. 우리는 흑백으로 나뉠 수 없는 그냥 복잡한 노이즈 덩어리예요. 그걸 인정하고 세상을 넓게 쓰세요. 나한테 안 맞는 것도 경험해 봐야 나한테 맞는 게 더 좋아져. 조금만 움직이고 조금만 더 넓게 쓰면, 격차가 무색해져요. 


Q. 앞으로 새롭게 도전해보고 싶은 게 있다면요?

디자이너로서 내가 여기 온 이유는 현지에서 일하는 사람한테 도움 되는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예요. 가게 간판을 활용해서 지역의 랜드스케이프를 만들어가는 작업, 얼마 남지 않은 지역 자영업자 대상으로 전자상거래 교육을 제공하는 시스템 구축 등등 그쪽으로도 야망이 있어요. 장기 프로젝트라고 생각하고 농사짓는 마음으로 하나씩 해봐야죠. 이번 워크숍이 그 시드 역할을 해줄 거고.


Q. 지금 고흥에서의 삶, 만족스럽나요?

그럼요. 운영체제가 윈도우에서 맥으로 바뀌는 것처럼 삶의 모드가 전환됐거든. 이제 사람들이 뭐라고 하든 나는 지금 내가 보내는 일상이 중요해요. 직업적으로 성취도 거뒀고, 내 인생을 내가 구원해 보기도 했고, 꽤 재밌는 인생을 살았잖아요. 그래서 이제는 어떤 목적보다 하루하루가 제일 중요해요. 일상을 해치지 않으면서 창작하는 법, 그 답도 나름대로 찾은 것 같아요.


fin.



𝗜𝗻𝘁𝗲𝗿𝘃𝗶𝗲𝘄𝗲𝗲 Siyoung Park

𝗘𝗱𝗶𝘁 Jeonghyeon Kim

𝗣𝗵𝗼𝘁𝗼𝗴𝗿𝗮𝗽𝗵 Chanwoong Jeong


Editor. 김정현

도시 라이프스타일을 다루는 프리랜스 에디터. 로컬 숍과 브랜드를 중심으로 F&B, 문화 예술, 패션 분야의 주목해야 할 사람들과 콘텐츠를 소개합니다. 기호와 취향에 관한 에세이 <나다운 게 뭔데>를 출간했으며, 토크 프로그램 모더레이터로도 활동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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